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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에는 술을 어떻게 마셨을까? 사극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 중 하나는, 양반들이 커다란 독에 담긴 막걸리를 사발로 들이켜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많은 양의 술을 한꺼번에 마시기 힘들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처럼 술잔이나 주전자 등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술을 마셨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어떤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은으로 만든 그릇을 만들었을까? 먼저 ‘은잔’이라는 이름 그대로 잔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위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실제로 왕실에서는 왕세자 교육용 교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또한 궁중 연회 때 신하에게 하사하는 선물로도 쓰였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소주를 담는 데 쓰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반 서민 가정에서 소주를 담아 마시는 경우는 드물었을 것이며, 주로 제사상에 올리는 용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은 식기 공장 위치

    양은 식기는 과거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던 그릇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취생이나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한 1인용 라면 냄비로 각광받고 있다. 이처럼 양은 식기는 저렴한 가격, 뛰어난 내구성 등 다양한 장점을 가지고 있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양은 식기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질까? 먼저 스테인리스 스틸판 위에 아연을 입힌 후 전기분해를 통해 산화아연을 만든다.

     

    이후 이것을 다시 알루미늄 판 위에 입혀 열처리하면 비로소 양은 식기가 완성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왜 굳이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내식성’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금속은 공기 중에서 쉽게 녹슬지만 합금을 이용하면 녹을 방지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전문용어로는 ‘내식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양은 식기는 여러 종류의 금속을 섞어 만든 합금강이기 때문에 오랜 기간 사용해도 부식되지 않는다. 또한 무게도 가볍고 세척하기도 간편하다. 게다가 값까지 저렴하니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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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주전자 공장 위치

    '은주전자'는 고려시대부터 사용되던 금속제 주전자다. 당시에는 주로 귀족들이 차를 마실 때 사용했는데, 일반 백성들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은수저'만큼은 양반이나 서민 할 것 없이 널리 사용됐다. 이처럼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시대에 금은 사치품이었다. 따라서 왕족이나 귀족 등 일부 계층만이 금제품을 소유할 수 있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금실을 섞어 짠 직물인 금박을 이용해 옷을 지어 입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개항 이후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생활양식도 크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커피와 홍차다. 1896년 아관파천 직후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맛본 후 즐겨 마셨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1930년대 경성 거리 곳곳엔 다방이라는 이름의 찻집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손님 대부분은 지식인층이었는데, 여기서 마시는 음료는 당연히 커피였다. 물론 가격이 비싸 아무나 즐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인스턴트커피가 개발되면서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결국 사람들은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양철통에 담긴 가루차를 애용하게 됐다. 이를 두고 세간에선 '양탕국'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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